초기작품은 유년기적 정서와 단편들이 작품의 양분이 되었고, 산과들, 모래땅 일구면 사는 주변의 사람들 모습과, 변화하면서 끝없이 펼쳐진 모든 색이 녹아있는 자연 정경들을 나의 작품소재였다. 경향신문사 경향갤러리에서 특별초대전을 하게 되었다. 전시는 성황리에 잘되었다. 그러나 지인 소개로 오신 관장님이 그림을 본 후 나에게 질문을 했다.
시대적으로 조금 진부하지 않나요? 한참 멍하니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재료에 의지해 개성강한 작업하는 신진작가들의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자기 합리화의 모습 같아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진 않았다. 오로지 나의 思惟(사유)는 눈에 보이는 대상들을 다른 환상적인 방법을 도외시하며 충실히 빛의 방향에 따라 표현한 ‘인상주의’의 그것을 닮아있었다. 정직한 표현을 통해 먼 길 돌아서라도 진솔하게 대상에 접근 하고자하는 것 이였다.
그렇다고 그런 선입관을 맹신 하지는 않았다 전통적 회화를 물리치고 독특한 표현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가고자 하는 시도는 색의 변화와 다양한 재료의 혼합 -한지. 흙. 돌. 판넬. 고가구...- 들을 반영, 평원위에 재구성을 반복하며 작품 변화를 증대 시켜봤지만 거듭되는 나답지 않은 결과물은 조화를 거부하며 이질적 느낌만 주는 아쉬움만 남겼다.
평범한 일상적 사물이나 인물을 작업실로 모셔와 오랫동안 주시하면 내 그림의 도구인 감성을 부여하고 의식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는 일에 차츰 몰두 하게 된다.
차차 화면은 가득해 지며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거의 마무리를 마치고 바라보는 시선에 뭔가 부족한 아쉬움. 그 모호한 정체를 찾아 좀더 재배치를 해 보았지만 해결이 막연했다 그 의문의 해답은 그건 아쉬움 아니라 과잉 이였다 욕심이 화면을 답답하게 했던 것이다 역설적인 비움의 아름다움을 몰랐던 것 이였다.
동양화에서 쓰는 비움의 화면 배치는 자칫 불성실한 작업으로 비춰졌기에 조화로운 공간의 비움은 그림이 없는 게 아니고 그 공간도 회화 부분임을 인식하고 과감하게 버리는 과정이 있어야 했다.
작업은 이제 시작이다.
방법론적으로 전통적 관념의 한계를 이해하고 뛰어넘어 더 나은 그림을 그려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고,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고향의 가슴처럼 정신적 위안이 될 수 있는 위로의 대상을 찾는게 목적이다.
현실과 미술의 괴리에서 오는 생활의 간극(間隙)을 좁히는 일 또한 가벼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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